서 론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3:10)
우리는 종종 “착하게 살면 되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면 되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생각에 단호히 경고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니...” 하나님의 율법을 항상, 온전히, 완벽하게 지키지 못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불편함이 복음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왜 저주 아래에 있는 걸까요? 그리고 어떻게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제, 그 이유와 해답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함께 찾아가 보려 합니다.
율 법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거룩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정의가 율법 안에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본질적으로 선하고 완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갈 3:10) 율법은 단 한 가지라도 어기는 순간 전체를 어긴 자로 간주합니다 (약 2:10 참조). 즉, 율법은 부분적인 순종으로는 결코 의롭다고 함을 받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항상, 온전히, 반복적으로 지켜야만 합니다.
이 기준 앞에 우리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는 거울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율법은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거룩한 기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 줍니다.
율법은 마치 거울과 같습니다. 우리 안의 더러움, 죄의 실체를 낱낱이 보여주지만, 거울은 씻어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24절은 말합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율법은 결국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한 통로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넌 안 된다”라고 선언할 때, 우리는 “그러면 누가 나를 구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의 유일한 해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항 상
갈라디아서 3장 10절은 단순히 "율법을 어기면 저주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훨씬 더 무섭고 냉정하게 말합니다.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바로 **“항상(always)”**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한두 번의 순종, 대체로 착한 삶, 마음의 진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즉 끊임없는 순종과 완전한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말로는 쉽지만, 삶에서 ‘항상’이라는 단어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항상 진실하게? 항상 정결하게? 항상 사랑하며? 항상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목숨 다해? 누가 이 기준을 만족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율법 아래에 있는 모든 자는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저주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 “항상”이라는 단어는 율법의 무게를 드러내고, 동시에 우리에게 은혜가 절실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저 주
갈라디아서 3장 10절은 매우 강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여기서 '저주"는 단순한 벌이나 불운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 생명의 근원에서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영적인 사형선고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롬 6:23), 죄 가운데 있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입니다(요 3:36).
율법을 통해 자신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서려는 사람은, 율법의 요구를 완벽하게 이행하지 못하는 순간 저주 아래에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타협이 없는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이 저주는 단지 미래의 지옥 형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미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평안, 기쁨, 자유와는 거리가 먼 삶, 두려움과 무거운 종교적 짐 아래 살아가는 상태 자체가 저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이 저주 아래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결 론
율법은 선하고 완전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 율법을 항상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저주 아래에 놓인 자들이었습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복음은 기쁜 소식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갈라디아서 3:13)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저주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우리가 지키지 못한 율법,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형벌을 그분이 십자가에서 다 감당하셨습니다. 그분은 흠 없고 의로우신 분이셨지만, 우리의 저주를 짊어지셔서 우리를 율법의 요구로부터 해방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은혜 아래,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더 이상 “항상 지켜야만 살아남는” 불가능한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더 이상 저주 아래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율법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무게를 대신 감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참된 자유와 생명을 얻게 됩니다.